"검은 거울: 박보마의 ‘분위기’에 대한 예비적 연구”


이연숙(리타)




1. 박보마의 개인전 《Sophie Etulips Xylang Co.,》은 지난 몇 년간 박보마가 실험해온 ‘가짜’들에 구체적인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부여하며,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 작업의 구조를 드러낸다. 전시의 제목은 박보마가 내세운 가상의 회사 이름이기도 한데, 이 회사가 하는 일은 거칠게 말해 특정한 종류의 위계─즉 진짜와 가짜, 숭고한 것과 하찮은 것, 가치 있는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분하는 체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전시가 ‘진짜’로 존재하는 회사들의 공식 홈페이지가 취하는 형식을 차용해 그들로부터 예상되는 내용을 지운다는 점을 고려하자면, 우리 중 몇몇은 이 전시를 ‘미러링’이라는 페미니스트 전략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다. 원래대로라면 실제 대리석이 깔린 그야말로 ‘번듯한’ 건물 전체를 ‘텅 비우는’ 방식으로 설치될 예정이었던 이 전시는, 여러 사정상 웹페이지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최대한 활용해 제작되었다. 그간 웹페이지에 게시되었던 다른 박보마의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Sophie Etulips Xylang Co.,》 역시 허무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수직-스크롤링과, 점차 화이트 노이즈처럼 주변으로 흡수되는 배경 사운드를 포함해, 상위-하위 구조가 없는 미로 같은 하이퍼링크로 인해 대단히 불친절한(다른 말로는 ‘실험적인’) 인상을 준다. 더욱이, 홈페이지를 구성하는 각각의 메뉴들과 설명들은, 자본주의적 상품으로서든 남성중심적인 언어로서든 간에 말이 되는 ‘의미’로 포획되기를 거부한다. 이는 ‘미러링’ 전략의 단순한 1:1 대응 방식, 즉 ‘내가 받은 것을 너에게 되돌려 주는’ 연쇄적 반사의 순환에서 이탈/초과하는 무엇을 드러낸다. 그러니 우리는 ‘자동번역기를 돌린 것 같은’ ¹ 박보마의 언어가 ‘소통 실패’를 겨냥하며 엔트로피를 가중시킬 뿐이며, 이를 통해 그녀가 ‘스스로 사물이 되는’ ² 과정을 상연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할까? 다시 말해 자신의 작업에 쉽게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꿋꿋할 정도의 ‘난해함’은, 그저 무엇으로도 읽히지 않으려는 작가적인 제스처에 불과한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박보마의 작업 세계에 대한 예비적 연구에 가까울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이 고집스럽게 참조하는 ‘여성적인 것’에 관한 비평적 틀거리를 마련하려는 의도로 쓰여졌다. 박보마의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여성적인 것과 관계하는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난해한’ 방식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러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즉 지극히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페미니스트 (예술) 실천으로서 고안된 ‘미러링’이 위치 지어진 장소를, 박보마의 작업 전체에서 여전히 유용하게 작동하는 전제로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 박보마의 검은 거울은 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흡수한다. 2. 박보마의 작업을 ‘여성적’이라고 말해도 될까? 나는 ‘여성적’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도대체 ‘여성적’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해명하고 싶은 동시에 포기하고 싶어진다. ‘여성적’이라는 수식은, 내가 박보마의 작업에 가졌던 첫인상인 ‘가볍고 예쁘다’에 자연스레 조응하면서, 정확히 그러한 묘사가 깊게 연루된 섹스/젠더 체계가 재생산하는 편견을 강화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박보마의 작업이 주로 ‘분위기’, ‘향기’, ‘빛’, ‘표면’과 같은 ‘가볍고 예쁜’ 비물질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성적’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도대체 나는 (그리고 내게 동의하는 여러분은) ‘여성’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여성’은 예쁘다. ‘여성’은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고 공간을 유유히 채우는 향기이고 대리석의 표면이다. ‘여성’은 텅 빈 허상이다. ‘여성’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물질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바로 암흑물질 dark matter이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여성적인’, 즉 ‘여성스럽다’는 형용사에 이미 포함된 ‘여성들’의 존재 방식이다. ‘남성다움’이 일종의 자격 증명을 거쳐 완결된 영웅 서사를 떠올리게 만든다면, ‘여성스러움’에는 내용이 없다. ‘여성스러움’이란 그저 모든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이라 여겨지는 어떤 것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다. 박보마가 다른 작업에서 인용한 앤 카슨을 빌려 말하자면, 분위기란 세계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작동케 하는 명사와 동사와는 달리, 그저 “순수하게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부사들 adjective와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분위기란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부수적), 결국 자연스럽게 배경화되는 것이고(의존성), 비슷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그것이 아니어도 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대체 가능성). 이러한 특성에 의해 하나의 분위기는 다른 분위기로 교환될 수 있으며 그들은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분위기, 즉 ‘여성적인 것’의 이러한 가변적이고 무가치한 특성은 결코 여성이라는 성별에 생물학적으로 귀속된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해부학과 형태학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관심사인 ‘분위기’를 다루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어떻게 ‘여성적인 것’을 끊임없이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느냐다. 뤼스 이리가레는 「여자들의 시장」에서 문명이란 곧 여성들을 거래하고 그 거래로부터 여성들을 소외시키는 남성들의 교환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오직 남성 노동의 증거 또는 산물로서만 가치를 지니기에 그들은 추상화되고 타자화된다. 심지어 ‘조잡한’ 상품으로서 여성들의 사용 가치는 오직 상품 간 비교를 통해서만 추정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는 교환될 수 있는 능력 이외에 다른 가치가 없다. (…) 상품들, 여자들은 남성의/남성을 위한 가치를 내비치는 거울이다. 이러한 작용으로 인해, 여자들은 반사 작용, 사색의 매체-질료인 자신들의 육체를 남성에게 내맡긴다.” ³ 뤼스 이리가레에 앞서 게일 루빈 역시 「여성 거래」에서 레비-스트로스의 ‘여성 교환’을 여성 억압의 체계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차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래되고 있는 것이 여성이라면,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을 주고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성들이다. 따라서 여성은 교환의 파트너라기보다는 관계의 연결통로로서 존재한다.”⁴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성이란 남성을 위한 ‘반사와 사색의 매체-질료’이며, 남성이라는 주어와 교환이라는 동사를 연결하는 통로인 ‘부사’인 셈이다. 달리 말해 교환 가치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여성-상품은 남성-생산/소비 주체의 욕망을 반사하는 ‘거울’인 동시에 그들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분위기’가 된다. ‘여성 교환’ 개념이 섹스/젠더 체계에 대한 유일하고 환원적인 분석틀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 같은 현상이 우리가 사는 문명의 경제와 문화, 언어에 필수 불가결한 토대 중 일부라고 가정해보자.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충성했던 가치들의 역사적 권위란 기실 남성들에 의한 여성 교환에 의해 축적되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충분히 봉사한다면 남성들에 준하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착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박보마의 작업, 그 중에서도 《Sophie Etulips Xylang Co.,》가 슬쩍 노출한 세계관은 어쩌면 이런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로딩을 거친 후 등장하는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우리가 맨 처음 마주치게 되는 페이지는 바로 ⧼Words of fldjf studio(플드즈프의 변) ⧽이다. 이 페이지는 회사의 ‘실체’를 드러내는 이후의 페이지들과는 다르게, ‘지난 수 년간 저 먼 곳에 있는 회사들’을 위해 일해온 ‘fldjf studio’(이하 ‘스튜디오’) 내부의 입장을 은유적인 방식으로 다룬다. 동시에, 회사로 대변되는 남성적/권위적/전통적 가치 체계와 관계하는 여성적 존재가 품는 ‘착각과 (그럼에도 불구한?) 믿음’을 우화적으로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회사는 그간 ‘꽁초, 종이 부스러기와 한두 줌의 공기’를 스튜디오에 보냈을 뿐이며, 그들과 직접 만나기 8분 20초 전에 이미 사라진 존재다. 그러나 스튜디오는 회사를 위해 ‘회사가 놓친 빛, 이미지들, 그곳에서 살고 있는 태양들이 만든 그림자 진 얼굴들’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관계를 ‘로맨스와 마법의 오라’로 부르며 회사를 여전히 ‘기다린다’. 왜일까? …“그러므로 상품은 아버지를 숭배하고, 끊임없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와 닮고, 그 존재를 모방한다.”⁵ 어쩌면 스튜디오는, 자기들이 아버지-남성-회사와 관계 맺은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은 아닐까? 박보마가 종종 그러듯이 말이다. 자기들이 영원히 속았고 배신당했으며 버려졌다는 사실을 매분 매초 떠올린다면, 즉 ‘까먹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언어 전부를 잃을 것이다. “‘나는 원한 적이 없는데 세계가 나에게 하늘, 감정, 물질, 시간…을 복제해주었고 또 빠르게 대체해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았으며 그것들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속지만 이내 내가 조정할 수 없는 영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시 까먹는다. 나의 미술 실천은 이 배신의 감정과 수치심에서 출발했다.’”⁶ 여기서 박보마는 ‘배신과 수치심의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시 ‘미러링’의 문제로 돌아가서, 이렇게 질문해보자. 《Sophie Etulips Xylang Co.,》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회사를 ‘텅 비우고’ 아무 의미도 없는 ‘분위기’로 뒤덮는 것일까?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배신감과 수치심을 되돌려주려고 한 것일까? (그러나 누구에게?) 3. 분위기란 만지거나 셀 수 없는 것이다. 분위기란 희고 단단한 조각상과 번쩍이는 빌딩의 수직적 기둥을 ‘위해’ 희생되는, ‘하찮고도 소중한’ 나머지일 따름이다. 아버지-남성-회사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들 주위를 부수적으로 장식할 뿐인 분위기. 그러니 애당초 ‘미러링’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양을 향해 태양으로부터 반사된 빛을 수십, 수만 개 쏘아 올린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그러나 관점을 바꿔보자. 만약 스튜디오가 대충 둘러댄 것이라면? 회사가 아니라 단지 그들 자신을 위해서 ‘빛과 이미지와 그림자’를 수집한 것이라면? “그러므로 상품들은 서로 말할 것이다. 분명 방언들과 특수어, 특히 ‘주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들로 말할 것이다.”⁷ 여성-상품-분위기들은 생산-소비-향유자인 남성들 몰래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바로 ‘수 많은 유리체 스크린 사이에 끼인’, 즉 거울 너머의 존재들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이 경우 ‘미러링’의 핵심은 받은 것을 결코 돌려주지 않는 것이며, 받은 것을 모조리 흡수하는 것에 있다. 그들에겐 필요 없지만 우리에겐 필요하니까. 그들이 모욕하고 남용하고 버린 것들은 이제 거울 뒤편에서 풍요로운 무질서로 번성한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특히 남성중심적인 가치체계에서, 분위기와 같은 여성적인 것들의 텅 빈 내부를 남성의 반대로 볼 것인가 혹은 남성을 제외한 나머지로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긴밀히 연결된다. 후자의 경우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텅 빈, 혹은 ‘암흑暗黑’이라고 표현할만한, 인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공백의 그야말로 우주적인 질량이 존재하는 것이다.⁸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Certification of Our Technology(기술) ⧽은 남성-회사의 시선에선 결코 포착할 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암흑물질’들의 단위를 세고 무게와 부피를 측정하는 기술이자, 검은 거울의 뒤편에서 ‘상품들’이 서로의 차이를 알아보게 만드는 기술일 것이다. 한편, 《Sophie Etulips Xylang Co.,》에서 내게 가장 공격적이었던 작업인 ⧼Executives(to Elysium)(파견 임원진(천국으로)) ⧽를 언급하기 위해, 미란 보조비치의 책인 『암흑지점』⁹를 인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 책의 맨 마지막 장에서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을 중심으로 허구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판옵티콘 저술들의 주된 요점은 어떤 현실─즉 판옵티콘 감옥─이, 그 존재에 있어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어떤 것에 의해, 즉 상상적 비존재들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비존재자가 현실을 그 존재에 있어 지탱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것의 비존재를 통해서다.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현실 자체는 와해되고 말리라.”⁰ 판옵티콘을 감시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응시라는 상상적 비존재자의 허구는, “감시등실 안의 암흑지점”이라는 얼룩으로 위장되며, 이 아무런 “불분명한 대상”인 얼룩을 통해서만 비로소 빛이 쏟아지는 판옵티콘 전체로 자신의 응시를 재생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을 보는 신의 응시 자체가 모아진 소실점으로서 ‘얼룩’─‘암흑지점’은 물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몸을 숨길 내부도 없이 투명한 판옵티콘의 죄수들에게 ‘외부의 그림자’이자 ‘응시하는 구멍’인 얼룩은, 매순간 모든 이들을 동시에 쫓아오는 눈이다. 그러니 신은 ‘암흑지점’에 부재로서 기거하는 셈이다. 나는 ⧼Executives(to Elysium)(파견 임원진(천국으로)) ⧽가 왜 ‘셀피’의 형식에서 얼굴이라는 개인성을 지우고 마치 집단 장례식의 영정 사진과 같은 모양새를 고수하는지 궁금했다. 이는 어쩌면 회사의 ‘공식’ 웹페이지를 (여성적─비물질 존재들을 위한) 애도와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임시적으로, 웹페이지에서 전시되지 않았다면 원래는 건물의 전면 유리창에 ‘그림자’로서 설치되었을 이 작업이, 마치 ‘얼룩’처럼 기능하기를 원했다고 가정할 것이다. 건물의 견고한 내부를 꿰뚫는 객체의 응시로서의 ‘구멍’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이 미처 개진하지 못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박보마의 흡수하고 소유하는 ‘검은 거울’은 아버지-회사와의 비판적 거리 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또는 (이미) 분열적으로 공모하고 있을까? 박보마의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인 건물을 만지는 사람들, 즉 청소 노동자들은 《Sophie Etulips Xylang Co.,》의 파편, 표면, 향기, 분위기와 같은 비물질 범주들과 나란히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들은 지나치게 타자화-낭만화되고 있지 않은가? 등등. 박보마의 작업 전체는 내게 길을 잃은 느낌, 내가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세계와 마주한 것 같은 막막한 느낌을 준다. 이는 분명 여성적 상상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와, 여성적 언어와 형식을 포착하는 감각의 둔감함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상의 질문들은 언젠가의 ‘본론’의 몫으로 남겨둔다.






1. 유지원, “fldjf─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를 평가하기”, 화이트의 가짜 노력, 유리 에메랄드 프리 오픈, 2017. 4p.


2. 윤율리, “초대의 글”, 같은 책, 2p.


3. 뤼스 이리가레, 이은민 역, “여자들의 시장”, 하나이지 않은 성, 동문선, 2000, 230p.


4. 게일 루빈, 신혜수, 임옥희, 조혜영, 허윤 역, “여성 거래”, 일탈, 현실문화, 2015, 110p.


5. 뤼스 이리가레, 같은 책, 232p.


6. 박보마, “추상 인정 물질 볼륨 기분 필터 환원”, 웹진세미나(8호), 2021.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8/pakboma/


7. 뤼스 이리가레, 같은 책, 233p.


8. “암흑물질(暗黑物質, 영어: dark matter)은 우주에 널리 분포하는 물질로서, 전자기파 즉 빛과 상호작용하지 않으면서 질량을 가지는 물질이다. 암흑물질이 분포하는 곳에서는, 그 중력에 의한 일반 상대성 이론의 효과 때문에 주변의 항성이나 은하의 운동이 교란되기도 하고, 빛의 경로가 굽어지기도 한다. (…) 암흑물질은 우주의 총 에너지의 대략 22%를 차지하며[2], 나머지는 가시광선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질과 암흑 에너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현재의 이론이다. 물질만을 고려하면, 암흑물질은 우주 전체 물질의 84.5%를 차지하며, 가시광선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질보다 훨씬 더 많다고 추측한다.” 위키백과 ‘암흑물질’ 항목 참조.


9. 미란 보조비치, 이성민 역, 암흑지점, 도서출판b, 2004. 나는 박보마를 통해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10. 같은 책, 16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