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phie Etulips Xylang Co., - 무한을 가지는 방법

유지원




-2. 우리를 위한 빌딩은 없다 스무 장 가까이 되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컬러로 출력하여 겨드랑이에 끼운 채 서울 한복판의 대형 빌딩에 들어간다. 우리의 제안서가 스팸 메일함에 줄줄이 꽂히던 중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었던 곳이 기어코 있었던 것이다. 건물 입구에는 건물 5층 높이까지 올라오는 육중한 조각이 서 있고, 유리 파사드에 구름이 담긴다. 로비의 바닥과 벽에는 대리석이나 철제 타일이 행렬을 맞추어 깔려 있고, 프런트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앉아 있다. 우리는 방문의 목적을 밝히고, 체온을 재고, QR 코드를 찍은 뒤 엘리베이터를 탄다. 공간 사용 관련하여 담당자 000 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000는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한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얇고 투명한 감각의 언어를 구사해 온 fldjf studio에 대해서, 그 배후에 있던 회사 Sophie Etulips Xylang Co.,의 출범에 대해서, 어쩌면 이 빌딩에 잠시 머물게 될 프로젝션의 빛과 장식품과 조립 가능한 사람에 대해서, 분위기와 울림으로 로비-무대를 채우는 환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조건이든 적응할 수 있고, 조율이 가능합니다. 미팅이 끝나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커피를 마신다. 문득 우리가 영화 〈향수〉를 보고 느꼈던 당혹감을 복기한다. “여자를 죽일 게 아니라 잘 협의하면 될 텐데. 머리카락이든 지방이든 좀 달라고, 그렇게 잘 협의해서 향수를 만들면 되잖아요.” 대기업 소유의 빌딩에 거듭 먹히고 뱉어지길 반복하며, 우리는 빌딩 안의 사람들과 잘 협의하려고 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에게 금전을 요구하거나 건물에 변형을 가하겠다는 엄포를 놓지 않는다. 그저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금방 도망치듯이, 빛이 자리를 옮기며 바닥을 쓸듯이, 귀걸이를 착용했다가 취침 전 다시 벗어 놓은 듯이 건물 안에 있다 가겠다고 말한다. 저마다의 이유로 흥미를 보인 몇몇 사람과 대화를 이어갔지만, 끝내 우리를 위한 빌딩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하지만 그것에 우리는 오래도록 낙심하지 않는다. 흐르던 물의 길이 막히면 어떻게든 다른 길로 여정을 이어가듯 우리는 을지로의 낡은 건물 옥상으로 향한다. 을지로3가역의 이름을 가져버린 ‘신한카드’와 2020년에 완공되어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것처럼 미끈한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호텔과 얼굴을 맞댄다. 그곳에서 우리는 S.E.X. Co.,의 임원진을 촬영한다. 우리 회사 임원의 얼굴은 망각되어 그림자로 남은 종이이며, 몸은 여타 물질을 조합하여 만든 것이다. 우리의 촬영을 보조하듯 건물의 유리 파사드가 빛을 반사해준다. 우리는 호텔 4층 로비라운지의 유리창을 뚫고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선망의 시선 또한 융통한다. -1. 하지만 모두 다 우리 빌딩이다 우리를 수용한 빌딩은 없지만 결국 그 모든 우리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작은 하늘을 기록하고 빛을 잡기 위함이었다. 하늘과 빛은 인간의 제한적인 감각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고로 무한한 것이다. 감각을 찢고 부상하는 무한성 혹은 이데아를 소유한, 혹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감각이 무한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다. 하지만 빌딩의 유리 파사드가 하늘의 빛깔을 담아낼 때, 그리고 손안의 휴대폰 스크린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 하는 순간 무한은 찰나의 감각으로 압축된다. 그것은 가질 법한 것이 된다. 리본을 고층 빌딩의 로비에 늘어뜨리거나 건물의 외관을 둘러버릴 때, 압도적으로 크고 겁이 나도록 단단한 것은 품에 들어온다. 표면을 운용하여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을 ‘가지는’ 수행은 물질 – 특히 반사체, 리본, 무거운 자재인 척하는 종이 등 경솔한 종류 – 을 배척하는 힘을 닮지 않으면서 무한에 대한 권리와 공간에 대한 점유권을 행사한다.바로 이러한 음(陰)의 미러링을 연쇄적으로 수행하는 회사 S.E.X. Co.,는 외부의 충격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를 수호하는, 세상이 쪼개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전파하는 이들과 조급하게 싸우지 않는다. 맞으면 맞는 방향으로 더 멀리 밀리고, 여지가 없는 곳에 기어이 끼어들어 단단한 것이 단단해야 할 이유를 상실하게 만들고, 실재(무한한 하늘과 빛)를 파편 혹은 이미지(파편화된 하늘과 반사된 빛)로 치환한다. 세상 속 회사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음의 미러링을 통과할 때, 무대 위에 올려진 파편적인 물질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세계, 즉 남성은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연약한 물질로부터 무한대의 공간을 사변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수백 명의 셀러리맨이 왕래하는 건물을 일곱 바퀴 돈다고 그것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망각으로부터 한시적으로 부활한 임직원이 천국에 닿도록 한들 그들이 온전한 육체로 현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연쇄적으로 반사된 빛과 멜로디의 울림, 지워지지 않는 향이 충만하여 이데아를 그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나 어디든 가득 채운다. 2021년, S.E.X. Co.,는 웹사이트로 분화하여 LCD 화면에 우리 물질의 표면을 쏘아 올린다. 그리고 우리는 아래와 같이 여러 회사에 우리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아마도 그중 다수가 스팸 메일함에 도착했을 것이다. 0. 서문: Sophie Etulips Xylang Co., 박보마 개인전 《Sophie Etulips Xylang Co.,》는 2013년 이래로 작가가 펼쳐온 복수의 아이덴티티를 Sophie Etulips Xylang Co.,라는 가상의 회사로 집약하여 이분법적 사고와 자본주의가 우선시하는 가치에 의해 배제된 가변적인 물질, 비선형적인 서사, 여성적인 언어와 미감을 펼친다. 박보마는 그간 fldjf studio, WTM deco & boma, dancer qhak 등 아이덴티티를 경유하여 배후의 어떤 회사를 암시하며 거대 자본의 집약체인 고층 빌딩을 한시적으로 점유하거나 조각, 오브제, 향, 사운드, 장식품 등을 제작했다. 규정하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에 몸체를 부여하고 감각의 진동을 증폭해온 사건들의 흔적 사이로 Sophie Etulips Xylang Co.,가 출범한다. Sophie Etulips Xylang Co.,는 공식 웹사이트를 선보인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점진적으로 회사를 소개하는 웹 프레젠테이션은 사진, 디지털 이미지, 사운드 등 다채로운 매체를 통해 아이러니한 설립 신화와 연혁, 빛을 다루는 기술, 파편화된 신체와 그림자로 출몰하는 회사의 주인과 임원진 등 총 11개의 메뉴에 걸쳐 반전된 세계의 논리를 펼친다. 이 회사는 물질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기보다 그 흐름으로부터 배우고, 건물 곳곳을 직접 만지는 말단 직원이 오히려 회사의 주인으로 등극하며, 물질 파편들의 조합이 곧 임원진의 실체를 구성한다. 견고한 콘크리트 바닥과 기둥 대신 투명하고 조각난 이미지로 가설된 이 회사는 수익구조와 실물 건물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재하지만, 과잉된 감각의 스펙트럼은 그것이 분명 존재한다고 증언한다. 이로써 감각을 불신하는 이성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가짜'라고 폄훼하는 것, 시장 경제에서 교환가치를 인정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위계에 균열을 내어 지배적인 가치에 의해 배제된 물질과 비로소 마주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