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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djf studio x qhak, 이미지와 나 사이에 레이어와 시선을 한 겹 더하다



김민관(아트신)






<서쪽과 동쪽의 동시 창문 일러스트레이션을 위한 서명> 사본1/n 2014ⓒ fldjf

박보마 작가가 비디오 릴레이 탄산에서 선보인 영상 작업은, 실은 다양한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프레젠테이션 형식의 수행적 퍼포먼스 차원에서 보였고, 한편 그 각각의 이미지들은 숫자가 섞인 독해하기 어려운 완벽하지 않은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과 함께 나타났는데, 시간과 포토샵 이미지라는 하나의 디지털 매체의 조건 아래 객체 측정의 단위들이 표시되어 일종의 작품에 대한 메타 데이터로서 작품을 지정해주면서 그 낯선 단어들에는 어떤 화자의 순간적 감정의 데이터가 함께 들어가 있었다.

다른 한편 그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wix’라는 (페이지 전환 방식이 아닌 끊어짐이 없는, 일종의 파피루스식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스크롤의 변신으로 생성되는 홈페이지라는 매체 조건 아래, 다양한 이미지들이 (비)연결되며 새로운 세계들을 자연스레 잇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박보마 작가는 gif파일에서 여러 도형들에서 부분의 이미지가 바뀌는, 마치 숨은그림찾기에서 두 이미지의 차이를 착시와 함께 인지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의 낯선 변이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것과 같이, 이미지가 머물다 끝나는 형식, 곧 프레젠테이션에서 자연스레 이미지가 넘어가며 발생하는 어떤 흐름의 변전에 대한 감각을 (그 이미지에 대한 주의뿐만 아니라) 작업의 감상의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두 개의 이미지를 연이어 보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두 개의 이미지의 연결, 그 이미지들의 사이까지 보는 것이다.’)

곧 작가는 그러한 지점에서 매체에 기식하며 매체 자체가 주는 감각을 실재로 치환하는 데서부터 어떤 독특한 감상을 도출하는 식으로 이끈다. 우선 이는 가령 10초가 작품의 제목 일부로 제시된다면, 그것은 10초라는 시간을 체험하는 것으로 이끌게 된다. 그 이미지에 부여된 정적인 시간성은 이 작품을 ‘무제’라는 이름의 형식 아래 표현적 자유를 제한·제약할 수 없는 표현의 무한한 세계를 지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조건을 지시하며 실제 그것을 완성하는 작가의 수행적 지시물(가령 ‘이것은 10초짜리 이미지입니다’)의 성격에서, 이름이 그 정보를 드러내며 관람의 조건을 규정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미지의 동역학적 변전을 이루는 그 시간 정보의 포함은, 그 데이터에 대한 의식으로 옮겨 간다. 여기서 보는 이가 인지하는 것은 사실 이미지의 지속이며, 이어 이미지의 소멸이며, 또 다른 이미지의 나타남이다. 그 시간 안에 무언가가 출현할 것임을 기대하는 한편, 그 시간이 곧 끝날 것임을 동시에 인지한다. 하지만 실은 그 이미지와 나 사이의 그 시간만큼의 묶임, 마치 시간 측정 장치가 된 것 같은 저항할 수 없는 부자유스러움, 그러나 실은 그 묶임에 어떤 쾌락이 동반되는 이상한 이미지에 대한 응시가 있다. 곧 이미지와 나 사이의 균열 어린 접합이 발생하고, 그것은 사라짐의 의식을 남기며 진짜 사라진다.

작가가 홈페이지에서 보여주는 비밀번호가 걸린 작업들은 현장에서 관객들 각자의 매체, 가령 노트북 등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틀 것을 요청하는 가운데 여기저기 다른 영상들에 결부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퍼지는데, 실은 이것은 따로 또 같이 하는 우연한 오케스트라의 결과를 낳는다. 작가는 자신의 스크린 샷들의 무작위적인 이미지‘들’의 발생과 그에 대한 연결 접속을 마치 세이렌의 소리를 따르는 눈 먼 이들의 현재로 전치하는 듯하다. 마치 우리는 오르골 같이 여기 저기 음계를 유동적인 경계 아래 입체적인 공간의 운동으로 울려 퍼지는 잘 조율된 작가의 건반 연주의 음악과 함께 멍하게 그것을 체험하면서, 결과적으로 평평하게 펼쳐진 이미지에 침잠하게 된다.

이는 이미지가 갖는 실은 광고와 흡사한 이미지들로, 이국적인 풍경이나 제품에 대한 사진을 다시 이미지로 처리한 것들을 이미지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치환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극히 평평한 이미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거기엔 어떤 분위기가 있어. 어떤 가 닿지 않는 틈이, 그 틈과의 만남이 있어.’ 마치 이렇게 작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작가는 자신이 댄서라고 주장, 혹은 믿는 데까지 나아간 것인가는 알 수 없다. 이미지의 조작술, 이미지를 하나의 실재로, 또한 공간으로 체험하게 하는 과정이 하나의 안무라면 안무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미지에 대한 침잠은 그 안에서 무수한 춤의 파편들을 길어 올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 평평함에 물결을 일으키는 소리가 이미 하나의 춤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일까.

작가가 보여주는 스크린 샷으로 나타나는 실은 제품 카탈로그의 일부는 상품으로 기능하기보다 상품인 것처럼 나타난다. 상품이 아니면서 상품인 것처럼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 상품에 대한 기대, 어떤 전달되기를 바라는 상품에 대한 매력에 대한 과잉을 마치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상품으로서 이차적 기호, 가령 ‘이것은 실은 팔려야 합니다’가 아니라 그냥 보는 이에게 상품이라는 형식 하에 어떤 독특한 이미지 그 자체로 ‘시현’된다. 이는 상품 미학에 대한 메타적 알레고리로서 비평적 주장을 선취(가령 ‘우리는 상품의 미학에 충분히 중독돼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오염되지 않은 미학을 찾아야겠지요.’ 혹은 ‘이것이 상품적 미학이라는 것으로 저는 이것을 풍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하기보다 그 상품이 만드는 기이한 세계로의 어떤 체험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실은 하나의 이미지를 평평한 스크린 아래 시간으로 측정된, 그 이전에 작가의 감정선에서 도출된 시간 특정적인 문법 아래 미니멀리즘적 도상으로 제시하는 것 같다. 이는 그러한 차원에서 장소 특정적이며, 그것은 가상 실재적인 공간에 기반을 둔다고 하겠다.

이미지에 시간과 감정을 부착하는 데 있어 실은 그 화자는 엉뚱한 문법을 구사하는데, 스튜디오의 이름 fldjf와 그와 협업하는 qhak이 각각 ‘리얼’과 ‘보마’를 영타로 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자의적인 듯 보이는 단어들의 사용에는 마치 초기 인터넷 메일 아이디어를 정할 때 흔한 이름들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디를 정하지 못해 자신의 이름을 영타로 칠 때와 같은 뭔가 유치하면서도 실은 기능적인 측면에서의 사용성이 마치 은밀한 풀어야 하는 기호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은밀함은 완전히 내적인 작가의 세계에 속하기보다 앞서 말했듯 사이렌의 목소리처럼 그것을 체험하는 이를 이끄는 내밀한 목소리로 오히려 외재적으로 곧장 드러난다.

“we are fldjfs. we are behind you. we will be here for you and last years. we were so luxury to be”와 같이 홈페이지 첫 페이지에 적힌 문장들은, 사이렌이 된 작가-이미지 연합의 세계에서 이미지와 나 사이의 어떤 틈, 그 아우라와 그 이미지에 빠져들게 하는 우리를 감싸는 이미지의 세계에 대한 안락함이 있으며, 한편으로 그 상품 미학으로부터 도출되는 “럭셔리”가 기이하게 더해져 유머를 더하면서도 긴밀한 ‘우리’, 곧 이미지와 나 사이의 가상적 실재의 공간에서의 관계를 상정한다. 이는 얼굴 없는 안드로이드 로봇과의 성적 에로티시즘으로도 연장되는 일면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평평한 이미지는, 그리고 다른 이미지로 넘어가며 반짝거리는 매체의 지각 조건까지 스크린의 미세한 돌기들은 바다와 같이 일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상한 제목의 단어들이 채 명확한 의미를 형성하지 않으며 하나의 목소리의 완성을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대신 삽입하며 그 목소리로부터 이끌려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됐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어떻게 가상의 이미지들 안에서 시공간과 세계를, 또 누군가의 목소리와 거기서 가정되는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내게 됐던 것일까. 이는 매체에 대한 (재)사유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작가가 하늘 풍경과 같은 것을 시간의 지정과 함께 찍는 건 프레임과 시간의 크기에 따른 새로운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의 감상이 결부된, 특정적 이미지가 된다. 곧 그러한 매체 조건과 자신의 감정들과 밀착 결합되는 차원에서 이미지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 오히려 그 불투명함 속에서 하나의 세계의 틈이 열릴 수 있다는 점에서부터 어쩌면 작가의 에세이적 이미지에서 시간 축을 더한, 영상 같지 않은, 말하자면 이미지-영상의 기묘한 결들을 확인케 해주는 것 아닐까.

이미지로 머무는 시간을 측정하며, 이미지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감소시키는 그 시간만큼 나와 이미지 사이의 시간을 체험하며, 그렇게 이미지와 관계 맺으며. 곧 작가는 대표적으로 이미지이지만 시간을 함축한 gif라는 이미지 포맷의 생명력에 주목하며 이는 입체적 인격들의 대화의 체험으로 전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 시간 측정 이미지들은, 이미지의 유예된 그러나 미리 도착하는(곧 끝이 이미 정해진), 그러나 사실은 그 무의미한 체험 자체에 대한 사랑 아닐까.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흘러나오는, (작가의 영상 상영회를 통해 그렇게 (재)정의된 시각 아래 그 홈페이지 모두가 실은 하나의 완벽한 작가의 작품 세계이자 각각의 영상이라는 정의 아래) 루핑되는 음악은 묘한 중독을 안기면서 그 반복의 무한한 시간, 일시적으로 출현했지만 끝나고 다시 출현하는 이미지들의 순간적 영원성에 대한 덧없는 갈망, 그렇지만 그 부속물처럼 따르는 (마치 그 건반이 오르골인 것처럼 퍼지는 것과 같이) 초점화되지 않는 감정의 소산으로 절대적인 힘의 영역을 발휘한다.




2015. 9. 4.

출처: https://www.artscene.co.kr/1586 [ARTSCENE: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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