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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마를 환영하며

: 기름에 젖은, 빛을 반사하는, 복제하는, 감정과 관계하는 종이



유지원



박보마 개인전《자비: 페인팅과 물질들 19XX - 2022》는 미지의 화가 ‘박보마’라는 작가적 정체성의 출현을 알리는 계기이자 작가의 회화 연작을 처음으로 다루는 전시다. 전시장은 종이에 유화로 그린 추상화가 표구나 타공 처리하지 않은 채 맨몸으로 벽에 부착되어 있다. 패턴의 반복 및 색면의 조합으로 구성된 평면은 일정한 시퀀스를 따라 전개된다. 각 작품은 마크 로스코, 헬렌 프랑켄탈러, 아그네스 마틴,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같은 추상화가의 대표작을 스스럼없이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한편 캔버스보다 가변적인 종이를 사용하고 그 표면에 비즈를 더하거나 감상에 젖어 들게 하는 멜로디로 공명을 꿰하는 등 전통적 회화의 궤도를 비껴간다.


박보마는 여러 정체성을 동시다발적으로 경유하며 작업 세계를 전개해왔다. 특히 그중 fldjf studio (2014~)는 빛을 반사하는 재료의 조합, 가짜 돈이나 종이 대리석, 디지털 드로잉 및 웹 프레젠테이션을 주 매체로 삼아 찰나의 순간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을 다루고, 요약되지 않는 분산적 언어를 구사했다. 한편, WTM decoration boma (2018~)는 fldjf studio에서 파생된 형태를 주로 장신구나 향수, 소품 등으로 제작하여 판매했다. 때문에 벽면에 평면이 가지런히 나열된《자비》는 일견 박보마가 이제까지 지향한 바, 즉 비물질의 복권과 가변적인 물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환은 모니터의 빛을 투과하여 떠오르는 디지털 이미지의 충만함이 종이 위 색, 면, 선이 선사하는 감응과 다르지 않다는 발견 혹은 믿음의 도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빛을 어떻게 가질 것이며 포착한 빛을 어떻게 물질적으로 드러낼 것인지, 나아가 어떻게 이 세계의 교환가치에 의거해 ‘가짜’라고 판명 받은 것을 위한 자리를 만들 것인지 고민해온 여정에 대한 잠재적인 대답은 평면에서 구현된 비물질과 물질의 극적인 화해인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작가적 아이덴티티 ‘박보마’가 출현한다. 박보마는 정체 불명의 아시아계 여성 화가로, 영미권의 대표적인 추상화가와 동시대인으로 추정된다. 박보마는 동료 서구인과 나란히 역사에 기입될 수 없으며 그들의 시간대에 함께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대 회화에 기꺼이 마음을 열고, 매혹되고, 몰입하고, 위로 받는다. 회화의 자비, 즉 육안으로 관찰되는 장면을 너머 감정의 심상과 눈을 감으면 보이는 안내 섬광까지 붙잡아 평면 위에 색과 형태를 얹는 일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항복한다. 회화는 더 이상 회피하거나 맞서 싸워야 할 경전이 아니라 찰나와 영원, 실재와 감상, 원형과 모방이 만나는 관대한 장이다. 박보마는 이러한 평면에서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 내재화된 근대적 억압에 의해 배제된 것, 특히 감정을 물질화하여 다룬다. 덕분에 박보마의 첫 개인전은 시대착오적이고 모사와 변주로 점철되어 있으나 기름으로 노랗게 물든 평면의 빈틈으로 감정이 관통하며, 빛이 발산된다. 혹여 박보마에 대한 찬사를 표하기 위해 꽃을 가져온다면, 전시장 중앙에 세운 화분에 놓일 것이다. 모두가 그것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박보마의 평면은 비물질에 대해 물질이 승리했다고 선포하는 대신 물질의 세계가 결코 불변하지 않으니 때를 살피며 그것의 자비를 만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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